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엠마 해밀턴 (문단 편집) === [[호레이쇼 넬슨]]과의 염문 === 당시 유럽은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혁명정부]]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정부의 대립으로 난장판이었다. [[미국 독립전쟁]] 이후 발령대기 상태로 백수로 집에서 부인 프랜시스 "패니" 넬슨(Frances "Fanny" Nelson, 1758~1831)과 지내던 호레이쇼 넬슨은 다시 소집되어 64문급 소형 [[전열함]] 아가멤논의 함장이 되어 지중해 함대로 배치되었고, 1793년, 넬슨이 35세, 엠마가 28세일 때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서 만나게 된다. 나폴리에 5일간 머물며 지원을 받은 넬슨은 그 후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맹활약을 하며 초고속 승진 가도를 달린다. 엠마와 윌리엄 해밀턴 경의 사이는 매우 좋았던 걸로 보인다. 엠마는 윌리엄 해밀턴 경을 "최고의 남편이자 친구"라고 표현했지만 엠마는 윌리엄 경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지 못했다. 정황상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발기부전이거나 무정자증이거나 둘 중 하나였던 듯. 이 때 엠마는 둘 사이에서 아이가 안 생기니 영국에 있는 자기 사생아를 나폴리로 데려오자고 했지만 윌리엄 경은 이를 거절했고, 나중에 사생아가 나이가 차자 영국 내에서 남편감을 찾아달라는 부탁도 거절한다. 이후 넬슨은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박살내고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하여 영국의 영웅이 되었다. 프랑스 해군을 박살낸 넬슨은 엠마와 처음 만난지 5년 후인 1798년, 생일 전에 나폴리로 돌아온다. 그 5년동안 넬슨은 갖은 고생을 다 했던 터라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넬슨은 전투에서 팔 한 쪽과 다리 한 짝을 잃었고 이는 거의 다 빠졌으며, 천식인지 뭔지 모를 지금으로서는 알수 없는 기침병에 고생하고 있었다. 장교이고 젠트리 계급이라 사정이 나았다지만 넬슨 역시 12살 때부터 해군에서 근무했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천성적인 배멀미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차갑고 습한 바다에서 야채도 제대로 못 챙겨 먹으며, 바닷물보다 짜서 바닷물에 담가놓으면 좀 덜 짜지는 염장고기를 맹물에 삶아 먹고 비스킷을 먹는 생활을 영유했다. 게다가 이끼가 끼거나 썩어가는 물에 술을 타서 먹으며 수십년을 보내다보니 넬슨은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하여간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폴리로 돌아온 넬슨은 패니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양아들 조사이아(당시 18세)[* Josiah Nisbet. 패니가 사별한 첫 남편 사이에서 난 아들. 당시 장교 후보생으로 넬슨 휘하에서 종군하고 있었다. 조사이아와 엠마 해밀턴의 사이는 나빴는지, 조사이아를 두고 엠마가 사팔뜨기 자식(squinting brat)이라 욕한 기록이 남아있다.]를 데리고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 머문다. 엠마는 넬슨이 도착하기 전에 사랑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데, 넬슨이 도착하자 달려와 안기며 "Oh God, Is it possible?" (세상에, 지금 일어나는 일이 사실인가요?) 라고 외치고 기절한다. 이후 엠마는 자기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저택에 머무는 넬슨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급기야 곧 다가올 넬슨의 40세 생일(9월 29일)을 위해 손님만 1,800명 가량을 초대한 파티를 연다.[* 여기서 엠마는 넬슨의 양아들 조사이아가 어릴 때부터 군생활만 하고 파티같은 곳에 잘 안 와봐서 쭈뼛대자, 너무 딱딱하다며 웃고 즐기라고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이아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붓 아버지가 친어머니를 버리고, 대놓고 바람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 파티에서 자기와 넬슨의 관계를 마음껏 과시한 엠마는 이때부터 넬슨의 비서로 활동하며 사교계 다른 사람들과 소개 등을 맡아 정치적 후원자가 되었다. 곧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기보단 이제 눈치 볼일이 없어서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엠마의 남편 윌리엄 해밀턴 경(1798년 당시 69세)은 이 관계를 오히려 응원 해줬는데, 자기 저택에서 엠마, 넬슨과 함께 살면서 "우리는 셋이 모여 하나다!" 같은 소리를 했다. 윌리엄 해밀턴 경은 이미 예전부터 50대에 은퇴하기를 원했었고 군복무로 배에서 생활하다보니, 건강도 급속도로 악화되던 시기인데다 당시 수명을 생각했을 때 당장 내일 사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였다. 넬슨과 윌리엄 경도 불편한 감정 없이 서로를 존중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캔들은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는 터라 곧 런던에서는 나폴리에서 넬슨 제독과 영국 최고의 미인 엠마 해밀턴과의 공개적인 불륜이 핫토픽으로 떠올랐다. 젠트리 출신도 아닌 평민 연습생으로 젠트리 신사들의 파티에서 벌거벗고 춤이나 추던 엠마가 귀족에다 국가 영웅인 넬슨을 유혹했다면서 온 나라가 웅성댔다. 하지만 엠마 해밀턴 역시 나폴리의 왕비와 친밀한 사이인데다[*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한 후 엠마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되어 넬슨에게 정치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큰 손이 되어 있었기에 이 스캔들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지는 못했다. 1799년 나폴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아일랜드 반란으로 정신 없던 영국 본토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넬슨이 반란을 진압하는데도 엠마가 중재자로서 큰 역할을 한다.[* 당시 윌리엄 해밀턴 경은 실질적으로 은퇴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 10년간 매년 본국에 보낸 자신을 은퇴/전역시켜 달라는 해밀턴 경의 요구가 1800년에 받아들여지고, 넬슨 제독 역시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임신한 엠마도 같이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으로 돌아온 넬슨은 엠마와 함께 런던의 한 호텔에 머물렀다. 넬슨의 정실부인인 패니와 노쇠한 넬슨의 아버지는 집에서 축하파티를 여니 어서 집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어서 직접 넬슨과 엠마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와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같이 한다. 여기서 패니는 엠마가 넬슨의 아이를 임신한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어쨌든 이 관계는 곧 신문에서 대서특필로 보도되고 온 영국과 전 세계가 이 토픽으로 핫하게 불타오른다. 넬슨이 없는동안 가정을 돌보고 헌신했던 정실부인 패니는 이 관계를 부정했지만, 엠마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으로도 대스타가 되어있던 터라 여론은 엠마 편이었다. 영국의 모든 여자들의 엠마 해밀턴의 옷차림, 스타일을 따라하려고 했고, 넬슨은 패니를 아예 무시해버린다. 이렇게 불편한 런던 생활이 이어지다가 12월에 넬슨이 부제독(Vice Admiral)로 승진하고 다시 원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자, 패니는 자신을 택하던지 엠마를 택하던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에 넬슨은 한치 망설임도 없이 엠마를 택하고 패니와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한편 넬슨의 아이를 임신한 엠마는 이미 사랑하는 남편인 윌리엄 경마저 자신의 사생아를 무시하는 것을 지켜봤기에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초조해했다. 심지어 윌리엄 경은 넬슨과 만나기도 전부터 엠마에게 사생아의 존재를 숨기라고 말할 정도였고, 엠마도 이를 따라 넬슨에게 자기 사생아의 존재를 비밀로 했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지도 모르겠다. 결국 1801년 1월에 넬슨과 엠마의 아이가 태어난다. 엠마는 넬슨과의 부적절한 관계, 자신의 출신성분 때문에 이 두번째 자식마저 사회로부터 거부당할까 불안했는지 이 딸의 이름을 넬슨의 이름을 그대로 따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Thomson)[* 사생아이기 때문에 넬슨의 성을 바로 이을 수 없었다. 찰스 톰슨이라는 넬슨의 휘하 장교의 이름을 따 본인 동의 아래 호적상 친아버지라고 기록한 모양.]이라고 지었다. 넬슨이 출정한 이후에도 엠마는 예술가이자 가수로서 런던의 유명한 극장들에서 공연을 했다. 이때 영국의 왕세자로서 훗날의 [[조지 4세]]가 되는 웨일스 공이 엠마에게 추근덕거렸다. [[조지 4세]]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지만 그의 사생활은 문자 그대로 개막장이었다. 오입질과 난봉꾼 생활로 왕자 시절 왕실 예산의 절반이 넘는 빚을 진 적이 있으며, [[입헌군주제]]가 자리잡은 영국의 왕세자로서 이례적으로 계속 정치에 개입하는 막장 행태를 보였다. 그렇다고 왕세자의 면전에다 꺼지라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엠마는 어쩔 수 없이 예의 갖추는 선에서 웨일스 공을 만나게 되었는데, 넬슨이 이를 질투하자 보다못한 해밀턴 경이 엠마는 너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편지까지 써야 할 상황이었다. 다음 해 2월 넬슨은 런던으로 돌아와 자기 딸을 만났다. 이때쯤 엠마는 넬슨의 형제에게서 고맙다고 편지도 받는 등, 넬슨 집안에서도 어느정도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넬슨이 나가있을 때에도 엠마와 넬슨은 항상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엠마는 넬슨에게 받은 편지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넬슨의 사실혼 아내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엠마는 조심스레 자신의 사생아의 존재를 넬슨에게 밝히는데, 뜻밖에도 넬슨은 엠마의 사생아 엠마 케어루(Emma Carew)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같이 지내게 했으며 타인에게는 "엠마의 친척(Emma Hartley)"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넬슨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넬슨은 엠마의 37세 생일파티를 여느라 아버지를 무시했고, 그렇게 엠마의 37세 생일날 넬슨의 아버지는 쓸쓸히 혼자 임종을 맞는다. 넬슨은 나중에 자기 아버지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 사실 엠마는 넬슨가에 인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1800년 엠마는 넬슨의 고향으로 가 넬슨의 부인 패니가 1787년 이후 13년간 보살펴왔던 시아버지 에드문드 넬슨(당시 78세)을 모셨고 넬슨에게도 자기가 아버님을 모시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넬슨은 10일만에 고향을 떠나 다시 엠마와 함께 노포크에 있는 해밀턴 경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후 엠마는 넬슨의 누나와 여동생들의 자녀들의 학비를 대주고 조카들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넬슨이 없는 동안 집안을 관리하며 넬슨가의 믿음과 지지를 얻어냈다. 결국 넬슨이 자기 아버지 임종도, 장례식도 참가하지 않았던건 엠마보다는 넬슨의 문제가 컸던 걸로 보인다. 넬슨은 사실 해군 특성상 땅 밟고 생활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집에 없는 때가 더 많았기도 했고...1801년 넬슨은 교회에서 자기와 엠마의 딸 호레이샤 넬슨 톰슨의 세례를 받았는데, 여기서 자기 딸을 나폴리에서 자기가 거두어들인 고아로 기록한다. 애초에 엠마는 윌리엄 해밀턴 경의 정실부인이고 넬슨과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던 불륜 관계였기 때문. 이쯤되면 눈치챘겠지만 넬슨도 앞서 엠마가 만난 남자들보다야 좀 나았을지도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막장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다. 역시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